1995년에 개봉한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는 로맨스 영화의 형식을 빌리면서도,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대화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의 의미, 우연과 운명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달합니다. 제시와 셀린, 이 두 남녀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단 하루 동안 나누는 대화는 마치 한 편의 철학적 에세이처럼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 속 대화를 중심으로, 세 가지 키워드인 존재, 삶, 운명을 중심으로 철학적 메시지를 심층 분석해 보겠습니다.
1. 존재란 무엇인가 : "지금 이 순간"의 가치
《비포 선라이즈》는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가치를 극대화한 영화입니다. 주인공 제시와 셀린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이후, 몇 시간만 함께 걷고 대화하고 싶다는 충동적인 제시의 제안을 셀린이 받아들이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들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 즉 하나의 '순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찰나의 시간은 그 어떤 장기적인 관계보다도 더 깊고 진실된 만남으로 발전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종종 잊고 사는 '지금 이 순간의 존재'를 강조합니다. 하이데거는 그의 철학에서 '현존(Dasein)'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이 세계 안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하며, 인간은 죽음을 의식함으로써 현재를 비로소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영화 속 제시는 셀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것, 이 순간들이 전부야."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의 진정성'과 깊이 맞닿아 있는 대사입니다.
빈 거리를 걷고, 레코드 가게에서 음악을 듣고, 야경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 속에서, 두 사람은 타인의 시선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내려놓고 그 순간의 감정과 대화를 오롯이 느끼고자 합니다.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영화의 대답은 간단하지만 깊습니다. 존재란, 누군가와 진정한 연결을 맺고,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2. 삶이란 무엇인가 : "인생은 대화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대화 중심'의 구성입니다. 이야기 대부분이 제시와 셀린의 끊임없는 대화로 채워지며, 이는 단순한 감정 교류를 넘어서 철학적, 인문학적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두 사람은 사랑, 죽음, 종교, 성(性), 가족, 외로움, 인간의 본질 등 다양한 주제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마치 철학 토론을 벌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러한 대화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문답법(dialectic)'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 질문과 대화를 강조했고, 진정한 앎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셀린과 제시는 서로를 설득하려 하지 않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내며 대화를 이어갑니다. 이는 단순한 사랑의 감정을 넘어선, 진정한 '소통의 미학'을 보여줍니다.
특히 셀린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요"라고 말하며, 현대인의 무의식적인 삶을 꼬집습니다. 반면 제시는 "말이란 건, 우리가 생각보다 더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에요"라고 말하며, 언어와 대화의 힘을 강조합니다. 이 장면들은 삶이란 결국,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그 속에서 어떤 자신을 발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깊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3. 운명이란 무엇인가 : 우연과 선택 사이의 철학
《비포 선라이즈》는 단순한 로맨틱한 우연이 아니라, 우연을 선택으로 이어가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철학적으로 탐구합니다. 제시와 셀린은 기차 안에서 마주친 아주 작은 우연을, '의미 있는 인연'으로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이는 철학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하며, 인간은 태어난 이후에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어 간다고 보았습니다. 즉, 우리는 우연한 존재이지만, 선택을 통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철학을 시적으로 풀어냅니다. 셀린은 "우리가 이 기차를 같이 타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가 시작됐어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연한 만남이지만, 그것이 어떤 서사로 이어질지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또한, 제시는 "이건 운명이야.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도, 지금 이 길을 걷는 것도."라며 순간의 감정을 운명이라 표현하지만, 결국 그 감정에 따르는 행동은 자신의 주체적 결단입니다.
둘은 다음 날 아침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짧은 만남이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것은 인생 전체를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삶의 방향을 살짝 틀어줄 수 있는 '경험'으로 남습니다. 이 경험은 운명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지만, 사실은 두 사람의 '깊은 선택'이었기에 더욱 진정성이 있습니다. 《비포 선라이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운명이란 미지의 무언가가 아니라 ‘지금의 선택’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비포 선라이즈》는 시간의 제약 속에서 탄생한 가장 인간적인 순간들을 통해, 존재의 의미와 삶의 본질, 그리고 운명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로맨틱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타인과 진실된 연결을 시도하고, 존재의 본질을 사유하게 만듭니다. 제시와 셀린이 나눈 말 한마디 한마디는 관객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며, 우리가 놓치고 있는 순간과 감정, 그리고 선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당신이 이 영화를 본다면, 그 속에서 사랑보다 더 깊은, 철학적인 여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